
연말연시를 맞아 거리 곳곳에는 오색찬란한 크리스마스트리의 화려함과 함께 한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해를
맞이하려는 사람들의 분주함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이러한 들뜬 분위기에는 아랑곳없이 당장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어린 나이에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년소녀 가장도 그들 중 하나다.
한국복지재단에 따르면 현재 공식 등록된 전국의 소년소녀가장은 올 3월 기준으로 총 2451세대, 3698명이다.
부모가 가출해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호적상 부모가 생존해 있어 정부 지원을 받지 못 하는 사람을
포함하면 30만~4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우리 사회가 따뜻하게 보살펴야 하는 아이들이다.
‘전국 소년소녀가장돕기 시민연합중앙회’는 사회를 대신해 이를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민간단체다.
“불우하고 어려운 이웃을 돕는 건 때와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변을 둘러보고 헐벗고 굶주린 이웃은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오경의(67) 전국 소년소녀가장돕기 시민연합중앙회(전가연) 총재는 연말이 다가오면서 더욱 몸과 마음이 바빠졌다.
이럴 때일수록 소년소녀가장들이 외로움이나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따뜻하게 감싸 안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오 총재는 지난 11월 6일 3대 총재에 취임했다. 1대 이건개 전 국회의원, 2대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뒤를 이어서다.
1996년 결성된 전가연은 올해로 창립 10주년을 맞았다.
서울마주협회장을 맡고 있는 오 총재가 총재직을 수락한 것은 전가연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이영훈 사무총장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 때문.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소년소녀가장과 불우청소년 돕기 사업을 펼쳐 온 이 총장은 정부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늘 안타깝게 생각해 왔다.
이 총장은 오랜 친분을 유지해 오던 오 마주협회장을 만나 “불우한 소년소녀가장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줄 총재직을 맡아 달라”고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서울 마주협회 550여 회원들의 아낌없는 후원과 더불어 총재직 수락을 받아냈다.
“저 자신 어렸을 때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집안의 몰락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죠.
이때의 경험으로 누구보다 소년소녀가장의 고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총재직을 받아들였습니다.”
오 총재는 경북 안동에서 ‘오 부자집’하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가계의 몰락으로 가족의 생계를 떠안아야 했다. 수차례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어려움은 컸다.
학비를 내지 못해 중학교를 다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졸업장을 받지 못한 오 총재는
지금도 그런 소년소녀가장들을 볼 때마다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을 못한다고 한다.
오 총재는 “인간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모든 것은 내가 한 만큼 돌아온다”며
내가 남한테 잘 하면 그 만큼 돌아오고, 해를 입히면 반드시 자신도 해를 입게 된다고 말했다.
오 총재는 이어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이 추운데 옷을 제대로 입었는지, 어떻게 하면 도움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며
“돈도 중요하지만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 총재 취임이후 소년소녀가장 돕기에도 탄력이 붙었다.
현재 서울마주협회가 공식 후원단체가 되어 100명의 소년소녀가장에게 장학금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22일 과천 한국마사회 컨벤션홀에서 여는 ‘2006소년소녀가장돕기 후원기금마련
송년음악회’에서 장학금 전달식을 갖는다.
장기 불황으로 마음의 여유가 많이 사라졌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 주변의 불우 이웃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오 총재는 사회 각 계층의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소년소녀가장이 밝은 미래를 엮어 갈 수 있기를 소망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전국 소년소녀가장 돕기 시민연합중앙회 총재를 맡으신 이유는?
▲내 자신이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도 청소년 시절에 소년 가장이었다.
어린시절 힘들었던 걸 알기에 작은 도움이나마 보태고자 참여하게 됐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는 거절을 했었다.
이유는 힘든 사람들을 보면 마음이 아파서였다. 얼마 전 총재직을 수락하고 나간 자리에 어린
소년소녀가장들을 만나게 됐다.
그 아이들을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 속으로 울었다. 6살 난 아이를 안았는데 그때의 아픔은 말로 설명을 못한다.
그 아이들을 보니 마치 거울로 나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아서였다. 어린 날의 추억이 너무나도 생생했다.
-소년 가장이었다고 하는데 어린시절에 대해 소개하면?
▲1940년 안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안동지방 제일 부자였다. ‘오 부자집’하면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고
조부님과 함께 말을 타고 넥타이를 항상 매고 다닐 정도였다. 조부는 독립운동을 하며 자금을 대주었다.
아버님 또한 고향에 초등학교 부지를 희사해 지금도 공덕비가 세워져 있을 정도다.
그러나 6․25전쟁이후 그 당시 지주들이 그러했듯 우리집안도 몰락했었다고 회고했다.






















